가면 수집: 얼굴 뒤 숨겨진 이야기
어릴 적, 우연히 동네 서커스단에서 접했던 한국 전통 탈의 강렬한 인상은 제 기억 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었습니다.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어딘가 슬픔을 담은 듯한 양반탈, 힘찬 기개가 느껴지는 장군탈. 그저 나무 조각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가면들이 살아 움직이며 각자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모습은 어린 저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죠. 그것이 아마도 제가 독특한 가면이라는 매력적인 세계에 관심을 갖게 된 첫 번째 계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성인이 된 후로는 <변검>이라는 영화를 보며 다시 잊혔던 가면에 대한 향수를 느꼈고 <하회별신굿 탈놀이>는 우리 가면에 대한 흥미를 배가시켰습니다.
1. 가면, 얼굴 뒤에 숨겨진 문화의 거울
제가 가면에 관심을 갖고 빠져들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가면이 단순한 얼굴 가리개나 장식품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가면은 그 것을 탄생시킨 문화와 역사의 정수를 담고 있는 그릇과도 같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나라의 하회탈은 단순한 연극 소품을 넘어, 당시 사회의 모순을 풍자하고 해학적으로 풀어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양반의 허위의식, 선비의 고리타분함, 중의 파계 등을 가면의 표정과 춤사위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주죠. 이런 한국 전통 가면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엿볼 수 있습니다.
2. 첫가면 수집: 인터넷으로 만나는 세계의 가면들
2016년쯤이던가 거제도에 놀러 간 김에 본 <베네치아 가면전> 전시회 이후, 저는 인터넷을 통해 본격적으로 세계의 독특한 가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그 방대함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내 특정 지역이나 테마를 중심으로 검색과 공부를 해나가기로 마음먹었죠. 저의 첫 수집품은 온라인 경매를 통해 비교적 저렴하게 구매한 작은 크기의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바울레(Baule)족 가면이었습니다. 그것은 가면에 대해 틈나는 대로 공부를 해나가던 중 부산 박물관의 <아프리카 2> 전시회를 본 직후였습니다. 바울레족은 특히 목공예에 뛰어났다고 하며 제가 구입한 가면은 실제 의식에 사용되던 오래된 유물은 아니었지만, 그들의 손길에 의해 만들어진 정교한 조각과 독특한 문양은 충분히 매력적이었습니다. 이 가면을 손에 넣었을 때, 그 원시적 느낌과 경외감으로 마치 먼 옛날 아프리카의 어느 부족 공동체의 북소리가 들리는 듯한 한 묘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3. 가면 수집의 매력: 예술성, 희소성, 그리고 이야기
가면 수집의 매력은 아주 많습니다.
● 예술적 가치: 가면은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예술 작품입니다. 오래 전부터 이어받은 숙련된 장인의 손길로 탄생한 가면의 섬세한 표현력, 대담한 색채, 독창적인 디자인은 그 자체로 감탄을 자아냅니다. 특히 베네치아 카니발 가면 같은 경우, 화려한 깃털, 보석, 금박 등으로 장식되어 하나의 예술품으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 문화적 이해: 다양한 문화권의 가면을 수집하고 연구하다 보면, 그 지역의 신화, 종교, 사회 구조, 생활양식 등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네시아 발리의 바롱(Barong) 가면이나 랑다(Rangda) 가면은 선과 악의 영원한 투쟁이라는 그들의 세계관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 희소성과 이야기: 오래되고 특정 의식에 사용되었던 진품 가면의 경우, 그 희소성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높은 가치를 지닙니다. 하지만 저는 단순히 희소성만을 좇기보다는 (물론 희소성이 높을수록 가격도 비싸기도 하지만요), 각 가면이 품고 있는 고유한 이야기에 더 큰 매력을 느낍니다. 이 가면은 어떤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만들었을까?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었을까? 상상력을 자극하는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죠. 오페라의 유령’ 속 주인공은 일그러진 얼굴을 가면 속에 숨기고 아름답게 노래하고, ‘탈춤’과 ‘마당극’은 권력자를 풍자하기 위해 등장했으며 또한, ‘배트맨’, ‘수퍼맨’, ‘아이언맨’까지 모두 가면 속에 자신의 모습을 숨깁니다. 최근 TV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자신의 모습을 가린 채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와 반전의 감동을 주는데 이것은 가면극의 구조가 확장된 것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그들이 가면을 썼을 때 그들에게 주어진 것은 '자유로움'이었다고요.
4. 나만의 가면 수집 철학
몇 년 전,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렸던 <세계 가면 특별전>은 제 안에 잠자고 있던 가면을 향한 열정에 다시 불을 지폈습니다. 또 작년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 개최한 <가면의 일상>이라는 전시회 역시 어두컴컴한 전시실, 은은한 조명 아래 신비롭게 빛나던 세계 각국의 가면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이야기를 제게 속삭이는 듯했습니다. 아프리카 부족의 정령을 형상화한 역동적인 가면부터, 베네치아 카니발의 화려하고 비밀스러운 가면, 일본 노(能) 연극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담은 가면까지. 그 압도적인 다양성과 예술성에 푹 빠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전시회를 보고 실제로 가면을 접할 때마다 그 기회들은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소유하고 연구하는' 즐거움을 더욱 부채질합니다.
지금까지 제가 모은 가면은 그리 많지도 않고 수집이라 말할 수도 없습니다. 한국 전통 탈 열 세 점, 아프리카 부족 가면 서너 점, 동남아시아에 갈 때마다 하나씩 모은 가면들 십 여 점 그리고 작은 베네치아 가면 한 점이 전부입니다. 하지만 양보다는 질, 그리고 각 가면과의 교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는 좀 더 발품을 팔아 국내외 가면 축제나 앤티크 시장을 직접 방문하여 살아있는 가면 문화를 체험하고, 저만의 스토리가 담긴 가면들을 하나씩 늘려가는게 저의 계획이고 바람입니다.
가면은 때로는 두려움을, 때로는 즐거움을, 때로는 신성함을 표현합니다. 그 변화무쌍한 얼굴 뒤에 숨겨진 깊은 의미와 이야기를 탐구하는 여정은 앞으로도 저에게 큰 즐거움과 영감을 줄 것이라 믿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중에도 저처럼 가면의 매력에 빠지신 분이 있다면, 혹은 이제 막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분이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그 신비로운 세계로 한 걸음 내디뎌 보시길 권합니다. 생각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한 경험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