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금은 번잡하지만 사람들은 바쁘지 않아 여유로움이 있는 유럽의 어느 거리 오후. 그곳은 파리 몽마르트의 데르트르이거나,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어느 거리이거나 골목길이어도 상관은 없습니다. 따스한 햇볕이 담장을 타고 내려오고, 길가에는 가지런히 놓인 노천 카페 테이블들. 화분에 담긴 꽃들이 일광욕을 즐기듯 피어 있는 풍경 속에서 저는 카페 테라스 그늘 아래 한 잔의 커피를 앞에 두고 있습니다. 그 순간 문득, 이 작은 잔 속에 담긴 세계 각국의 커피 이야기와 함께 그 다양함 속으로 커피 여행을 떠나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습니다.
커피는 단순한 음료를 넘어, 전 세계인의 일상과 감성을 잇는 매개체가 되었다는 사실은 이제는 이미 새로운 문화는 아닙니다. 다만 그 속에는 품종에 따라 다른 뉘앙스, 추출 방식에서 비롯된 맛의 깊이, 그리고 각 나라만의 커피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데에 그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오늘은 이 커피잔을 통해, 그 이야기들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싶습니다.
1. 원두 품종이 만들어낸 다른 커피의 세계
☕ 아라비카(Arabica)
제가 가장 좋아하는 라떼에 주로 사용되는 아라비카입니다. 첫 모금을 입에 머금으면 향긋한 향이 코끝을 스치고 부드러운 실크가 혀끝에 맴돕니다. 전 세계 커피 생산량의 약 60~70%를 차지하며, 적당한 산미와 은은한 단맛, 풍미가 매력적인 품종입니다. 게이샤, 티피카, 버번처럼 품종마다 그 개성이 뚜렷해서 커피를 마시는 일이 곧 여행이 되게 해주는 신비롭고 고급스러운 커피이기도 합니다.
☕ 로부스타(Robusta)
베트남에서 처음 경험했던 진한 로부스타 커피. 강한 쓴맛과 묵직한 바디감은 아침잠을 단숨에 깨우곤 합니다. 실제로 현지인들도 출근길에 바이크를 세우고 진한 로부스타 한 잔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카페인 함량이 높고 병충해에 강해 인스턴트 커피나 에스프레소 블렌드에 자주 쓰이지만, 현재는 고급화가 많이 진행되고 있는 품종이기도 합니다.
☕ 리베리카(Liberica) & 엑셀사(Excelsa)
● 리베리카는 세계 커피의 2% 정도만을 차지하는 품종입니다. 라오스의 가정집에서 우연히 접한 적이 있었는데, 처음이라는 낯설음보다는 풍성한 과일 향과 독특한 바디감이 예상과는 달리 꽤나 매력적이었던 커피입니다.
● 엑셀사는 리베리카의 한 종류로서 블렌딩에 쓰이는 원두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커피의 세계가 얼마나 다양한 품종을 품고 있으며 넓은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커피 애호가라면 한 번쯤은 궁금해해도 좋은 이름들입니다.
2. 추출 방식에 따른 커피의 변주
커피를 추출하는 방식에 따라 그 개성과 맛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는 주로 에스프레소 기반의 라떼를 마시지만, 어떤 날은 프렌치프레스처럼 느긋하게, 또 어떤 날은 드립으로 집중해서 한 잔을 즐기기도 합니다. 선택은 온전히 저만의 몫이니까요. 커피가 어떻게 다양하게 변주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에스프레소: 짧은 시간 안에 고압으로 추출해 진한 크레마를 자랑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바에서 서서 마시는 에스프레소가 제격입니다.
● 핸드 드립: 원두의 섬세한 향미를 살리는 데 탁월합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음미하며 마시는 드립 커피는 하루의 리듬을 느리게 만들어 줍니다.
● 프렌치프레스: 뜨거운 물과 오일, 향이 풍부하게 어우러진 커피를 천천히 누르며 기다립니다. 서두를 이유는 없으며, 기다림마저 행복한 시간입니다.
● 콜드브루와 더치: 여름날, 부드럽고 달콤한 한 모금이 위로처럼 다가오는 깔끔한 경험을 제공해 줍니다.
● 사이폰 커피: 커피를 예술처럼 느끼게 해주는 특별한 추출 방식입니다. 진공 압력을 이용하는 일본인의 섬세한 성향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일본의 한 카페에서 커피 추출에 심혈을 기울이던, 장인 같던 그의 손놀림이 기억납니다.
3. 에스프레소에서 파생된 다채로움
에스프레소는 단독으로도 훌륭하지만, 다양한 변주로 우리의 취향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줍니다.
● 아메리카노: 에스프레소에 뜨거운 물을 더한,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깊은 커피라 할 수 있습니다.
● 카푸치노 & 라떼: 에스프레소에 우유가 더해져 부드러움이 완성되는 커피. 저는 늘 라떼를 선택하지만, 그날의 기분에 따라 거품의 농도도 다르게 느껴집니다. 참고로 태국과 베트남에서는 카푸치노와 라떼를 반대로 제공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마키아토 & 모카: 커피와 우유, 혹은 초콜릿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입니다. 가끔은 달콤한 모카 한 잔이 하루의 당 보충이 되기도 하지요.
4. 나라별로 빛나는 커피의 개성
이제는 커피 한 잔이 각 나라에서 어떻게 다르게 사랑받는지를 들여다볼 차례입니다.
커피는 각 나라의 기후, 역사적 배경과 식문화, 그리고 감성에 따라 다양하게 그 꽃을 피워왔습니다. 추출 방식보다는 그들의 커피 스타일과 생활면에서 조명해보고자 합니다.
● 이탈리아: 진하고 간결한 그들의 커피는 그들의 삶의 리듬과 닮았습니다. 에스프레소, 리스트레토, 라떼 마키아토, 그리고 아포가토 같은 종류들이 있습니다.
● 프랑스: 카페 오 레는 프렌치 프레스 커피에 우유를 섞는 방식이며, 낭만적인 파리의 아침, 커피와 바게트 한 조각으로 거리의 청소차를 구경하며 찬란한 아침을 시작하는 데 어울립니다.
● 미국: 대용량 아메리카노, 차가운 물로 추출한 콜드 브루. 실용적이고 빠른 그들의 라이프스타일에 잘 어울리는 방식입니다.
● 터키: 곱게 간 원두 가루를 물과 함께 끓여 만드는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진득한 윗부분만을 친구들과 나눠 마시며 담소를 나눕니다.
● 베트남: 연유와 커피의 조화. 길거리 노점에서 얼음을 올려 마시는 ‘카페 쓰어 다’. 뜨겁고 건조한 남방의 거리에서는 얼음 연유 커피가 제격입니다.
● 일본: 사이폰 커피와 노른자 커피(키미 라떼). 장인정신과 실험정신이 공존하며, 그들의 섬세한 삶의 방식과 닮았습니다.
● 한국: 믹스커피, 팬데믹 기간에 유행했던 달고나 커피, 그리고 더치. 저와 우리 대부분의 일상과 친숙하게 함께해온 커피들입니다.
5. 한 잔의 커피가 담아낸 세계
커피 한 잔 속에는 수많은 문화와 이야기, 사람들의 취향과 감정이 녹아 있습니다. 그것은 어제도, 오늘도 아침의 첫 시작이 되었고, 누군가와의 인연이 되었으며, 내 하루를 지탱해 준 조용한 쉼표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오늘도 유럽의 오래된 화강석 골목길과 노천 카페의 테라스를 떠올리며, 이 커피 한 잔 속에 담긴 세계의 향을 천천히 음미해 봅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그 골목 어딘가의 카페에 앉아 지금과는 다른 향의 커피 한 잔에 행복해하며 이 글을 떠올릴 날을 기대해봅니다.